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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수행인데 도와주심 안될까요? 오늘 까지인데 사진 양식으로 써야된대요(고려)

오늘 까지인데 사진 양식으로 써야된대요(고려)

태종 이방원 입니다

태종 이방원

조선의 제3대(재위: 1400년~1418년) 왕.

즉위 과정

1398년 정도전 일파가 요동 정벌계획을 적극 추진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 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처지에 이른다. 이에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로써 정도전과 세자 방석(芳碩)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1399년(정종 1)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다. 그리고 강원도와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分領)하였다. 1400년 방간(芳幹)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포(朴苞) 등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였다.

그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병권을 장악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고 군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어 1400년 11월 정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

왕권강화책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해 공신과 외척을 무더기로 제거하였다. 1404년에는 3년 전의 이거이(李居易) 난언사건을 들춰내 이거이와 이저(李佇)를 귀향시켰다. 1407년에는 불충을 들어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 · 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하였다.

1414년에는 중잉집권제 체제 강화

중앙제도의 정비

1401년에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하여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지방제도의 정비

1403년과 1406년에 고려 말 이래의 문란한 지방제도를 개편하려 했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1413년에 개편하였다. 즉, 같은 해 10월에 완산을 전주, 계림을 경주, 서북면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로 고쳤다.

군사제도의 정비와 국방 강화

태종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즉위한 만큼 군사에 관심이 극진하였다. 먼저 왕 개인을 위한 군사에 유의하여 즉위하던 해에 수하병을 갑사(甲士)로 편입시켰다. 의관(衣冠) 자제 중 무예에 뛰어난 자를 뽑아 별시위(別侍衛)로 편성하였다.

토지 · 조세제도의 정비

양전사업을 벌였다. 1405년부터 이듬 해까지는 6도를, 1411년부터 1413년에는 평안 · 함경도까지 양전(量田)을 시행해 모두 120만여 결의 전지를 확보하였다. 군자 보충, 조운 타개, 신권 억압을 위해 사전(私田)의 지배를 강화하였다.

사회정책의 실시

1401년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해 상하의 백성이 억울한 일을 자유롭게 청원하거나 상소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1410년에 공물과 이중으로 징수된 호포세(戶布稅)를, 1415년에는 포백세(布帛稅)를 폐지하였다. 1418년 여러 군 · 현에 양봉통(養蜂筒)을 설치하는 등 백성의 부담을 덜어 줬다.

교육 · 과거 제도의 정비

개국 당시의 유학자가 대부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죽어 유학 진흥과 대명 외교를 위한 학자 양성이 요구되었다. 1404년 권근(權近)을 책임자로 유학 ·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 성균관과 오부(五部)의 학생을 교육하게 하였다.

대외정책

1401년 명나라 혜제(惠帝)로부터 고명(誥命) · 인신(印信)주9을 받았으나 성조(成祖)가 왕위를 계승하자 이듬 해 하륜 등을 보내 등극을 축하하였다. 그리고 혜제가 준 고명 · 인신을 개급해 줄 것을 요청해, 1403년 새 고명 · 인신을 받음으로써 대명관계를 정립시켰다.